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이 세상 역사의 궁극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책입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가장 확실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 성경의 주요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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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참으로 계십니까?
21
성경통신학교
2014-06-25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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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참으로 계십니까?

미 동부 지역 여행 중에 한 동굴을 관광하게 되었습니다. 안내자는 관광객들을 동굴 깊은 곳으로 안내한 후에 동굴 속의 조명을 꺼버렸습니다. 순간, 관광객들의 호흡이 멎은 듯 하고 정말 칠흑같은 흑암 속에 모든 것이 정지해버린 것 같은 순간을 경험하였습니다. 어두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무리 별 빛 하나 안 비치는 한밤중의 어두움이라도 진짜 어두움은 아닌 것입니다. 어디선가 희미한 빛이 사위를 두르고 있기 때문에 잠시 후면 그 어두움에 눈이 익고 어렴풋이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우리는 다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한낮의 밝은 빛 가운데서 살다가 밤을 맞이하고 등불을 껐을 때 낮의 빛에 비교하여 어둡다고 말하는 것뿐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것을 진짜 어두움이라고 생각해버리는 습성에 익숙하여져 있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세살난 수지는 제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는 것을 엄마에게 배웠습니다. 수지는 곧장 열까지 셀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장하고 자랑스러웠는지 할아버지에게 자랑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녁상을 물린 뒤에 수지는 할아버지 방으로 쪼르르 달려갔습니다.
"할아버지, 나 수지야, 들어가도 돼?"
"오냐, 그럼 우리 수지가 못 들어오면 누가 들어올까!"
수지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할아버지에게 숫자 세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할아버지, 나 일, 이, 삼, 사 할 수 있어."
자랑스러운 얼굴로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수지는 뽐내고 있었습니다.
"오, 그래, 수지 참 장하구나, 그럼 어디 세어 보련?"
수지는 두 손의 손가락을 펴면서 장한 목소리로 일, 이, 삼, 사, 오, 육, 칠, 팔, 구, 십을 세었습니다.
"할아버지 나 잘하지?"
"그래 참 잘 했구나. 그런데 겨우 십까지 세었어? 십일, 십이도 있는데."
할아버지의 이 말에 수지는 낭패한 얼굴로 할아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더니 드디어 야무진 소리로 한마디했습니다.
"아이, 할아버지, 그런 것은 없어."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
우리는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 참으로 알고 있습니까? 정직하게 생각하고 정직하게 대답해보십시다. 내가 경험한 동굴 속의 어둠이 진짜 어두움인지도 모르지만 빛 속에서만 살아가는 우리들은 진짜 어두움이 어떤 것인지를 모릅니다. 그처럼 또한 우리는 없다는 것의 진정한 상태도 모르는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는 있는 것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만 눈앞에 안보이면 없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어릴 때부터 길들여졌고, 자라면서 교육과 경험으로 관념의 세계를 배우면서도 인간의 학문과 연구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증거되지 아니하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 방식에 익숙하여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있느냐 없는냐는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인간의 불완전성과 인간의 지식과 경험의 한계에 대하여 정직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욥 38:2)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식과 이해의 한계성을 여러 번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세상 사물에 대하여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하여도 다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거든 하물며 계시의 차원인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인간의 지식을 가지고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건방지고 교만한 태도입니까? "사람이 아무리 애써 궁구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비록 지혜자가 아노라 할지라도 능히 깨닫지 못하리로다"(전 8:17). "이것이 인간의 지혜와 지식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그래서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그들은 화 있을 진저"(사 5:21)라고 선언합니다. 인간 세계의 사물들에 대하여도 다 알 수 없는데 "네가 하나님의 오묘를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온전히 알겠느냐"(욥 11:7)는 질문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욥은 스스로 생각할 때 까닭없는 고초를 겪게 되었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과 끝없는 논쟁을 벌입니다. 그러다가 젊은 엘리후에게 책망을 들으며 잠잠할 때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욥에게 질문하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욥 38:4). 이 질문에 욥이 대답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이 땅의 기초를 놓을 때 욥은 없었습니다. 인류 아무도 그때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일을 아는 것처럼 왈가왈부하면서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고 있을 뿐입니다. 욥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깊이 뉘우치고 자기 앞에 말씀으로 현현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백합니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노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이니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 42:2,3).
어머니의 화려한 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보던 꼬마가 "엄마, 왜 결혼식 할 때 나는 안데리고 갔어?"라는 투정을 들으면서 엄마는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단 한번도 아무 것도 없는 때에 있지 않았고 참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결과만 있는 존재
그런데 우리는 있습니다. 있다는 것은 결과적인 사실이지요. 사람에게 있는 하나의 불행은 결과만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는 결과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있게 되었는지를 스스로 알 수 없는 비극의 존재들입니다. 아니 이것은 불행이나 비극이 아니라 가능성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부단히 그 결과의 원인을 추구하는 존재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는 결과에 대한 원인을 알기 전에는 평안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결과에서 원인을 추리합니다. 그렇게 추리하여 얻은 결론은 옳을 수도 있고 전혀 엉터리일 수도 있습니다.

대학에서 성경을 강의할 때에 믿지 아니하는 학생들의 조소 섞인 질문 공세를 자주 겪었습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과연 증명되는 것입니까? 나는 빈정거리는 어조로 짓궂게 질문하는 학생에게 되물었습니다.
"이사람, 자네는 아버지가 계시는가?"
"예."
"그러면 자네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증명해 봐."
나는 그 학생의 합리적인 대답을 기대하면서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참으로 학생답지 않은 치졸한 것이었습니다.
"그거야 날마다 보고 사는데 증명을 못해요. 원하시면 모시고 오겠습니다."
"흠, 참으로 확실한 증명이군. 그러면, 자네가 날마다 아버지를 보고 살지 않는다면 증명할 수 없겠군."
나는 약간 빈정거리는 어투가 되어 말을 계속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아들은 아버지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아버지가 없겠군,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그 학생은 조금은 당황하는 기색이 되었습니다.
"아니지요. 그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거나, 혹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있는 것 뿐이지 아버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
교실은 조금은 조용해졌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아, 어찌 대학생이 되어서 겨우 그런 대답이야. 나는 자네 아버지가 계신 것을 두 말 할 수 없도록 증명할 수 있어."
"증명해 보세요."
그 학생은 약간 무안을 당한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건 간단하다. 자네 어디서 났어? 자네 아버지가 계시다는 결코 반박할 수 없는 증명은 자네의 존재야. 그렇지 않은가? 자네가 있다는 것은 자네 아버지가 계시다는 증명이 아닌가? 그 이상 더 확실한 증명은 없어. 그것이 논리적으로 정리가 안되어도 확실한 증명이지.

부모의 존재 증명
부모는 자녀들의 존재 원인입니다. 또한 자녀들은 부모의 존재 증명입니다. 만일 자녀에게 부모가 없다면 자기 존재 원인을 알수 없고 결국 자기가 누군지 모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녀들이 부모에게 패륜하는 일에 대하여 단호합니다.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5,17). 왜냐하면 이런 행동은 자기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존재 근거를 부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주장한 것과 같이 존재가 없어져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 주어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주간 한국에서 흥미 있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 기사의 주인공이 아직도 생존하고 그 가정과 자녀들이 있을 것이 확실한데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이 실례가 된다면 그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하는 바입니다. 기사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한 젊은이가 묵동 사무소에 혼인 신고를 하러 왔습니다. 그가 신고 용지에 기재 사항을 기록한 후에 신고서를 담당계에 제출했을 때 계원 용지를 훑어보다가 관향란(貫鄕欄)에 본(本)을 적는 것을 빠뜨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본을 적는 것을 잊었구만요. 본도 적어 넣으시지요."
"저는 본을 모릅니다."
"뭐라구요? 본을 모른다니, 그럼 김씨인 줄을 어떻게 압니까?"
"그것도 모릅니다."
아마 동 직원은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여기 성을 김으로 적었습니까?"
"남들이 김씨, 김씨 하니까 그냥 김씨 하기로 했지요."
"그게 무슨 이야기지요?"
사연은 그가 전쟁 고아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비참한 역경 속에 전전하며 자라서 이제는 결혼을 하고 혼인 신고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가 노동판을 전전할 때 사람들이 그를 김씨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서 자기 성이 무엇인지 도무지 모르지만 남들이 그렇게 부르니까 김을 성으로 하도록 스스로 결정하고 김씨가 된 것입니다. 그의 딱한 이야기를 듣고 동 직원은 불쑥 말하였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묵동에서 결혼하고 묵동 사무소에 혼인 신고를 했으니 본을 묵동으로 하면 어떻겠소?"
그래서 한국에 묵동 김씨의 조상이 되게 되었다는 기사였습니다.

자기를 아는 것과 계시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줍니다. 특히 자기의 근본을 아는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부모를 모르면 자기를 모르고 부모를 아는 자라야 자기를 안다는 평범하면서도 잘 생각하지 못하는 진리를 잘 설명하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이미 사람은 왜 믿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를 다룰 때에 잠깐 언급하였듯이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이미 있는(先在)존재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주지 아니하면 그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또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들에게 계시적 존재입니다. "내가 너의 아빠다, 엄마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녀들에게는 그들의 존재 원인을 가르치는 것이요 그들의 신분이 무엇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계시(啓示)의 언사(言辭)인 것입니다. 물론 어려서 엄마 품에 안겨 젖을 먹으며 감각으로, 체취로 엄마와 아빠를 확인하게 되는 아기 시절에 이런 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거쳐서 부모를 확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자녀들이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이치는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와 같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함으로 자기의 존재 근거와 존재의 방법을 알지 못하는 모든 아담의 후손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계시로 그들의 근원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계시의 말씀이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누구인지 안다는 것은 "누구의 아들 딸"이라는 것을 안다는 뜻이 됩니다. 그 부모가 누구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야 어떻게 내가 누구의 아들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사람은 결국 각자가 살아가고 있지만 그 각 개인이 누구라는 신분을 아는 것은 부모와 가문을 제해 놓고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묘한 이치가 아닙니까! 결국 부모와 가문을 모르면 아무리 그가 존재하고 있어도 그는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존재하는 슬프고 외로운 표류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족보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족보
우리 조상들은 옛날부터 가문과 뿌리를 중히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명문 세가들은 족보를 잘 마련하여 보관하였고 그것을 끊이지 않고 후손들에게 이어주는 것을 문중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여겨왔습니다. 족보는 그 가문의 후손들에게 그들의 조상과 근본을 가르쳐주는 계시(?)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문명이 밀어닥치면서 족보와 가문에 대한 인식이 엷어진 것도 사실이나 요즘은 뿌리에 대하여 확실히 알려는 정신들이 부흥하고 있는 것같습니다. 가문과 족보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것을 언제든지 알려주는 기관이 생기고 성씨의 고향이 출판되고 뿌리 곧 조상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여튼 사람들은 그 가문의 역사와 최초의 시조를 알고자 합니다. 그런데 그 성씨의 시조는 불행하게도 누구인지 모르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경주 김씨는 알지공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계림의 닭소리로 끝납니다. 그러면 그들은 닭의 후손이란 말입니까? 밀양 박씨는 박혁거세까지 거슬러 올라간 후에는 양산 밑에 말이 두고 간 박같은 알에서 끝납니다. 그들이 말의 후손이란 말입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족보를 대단히 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조상을 대단히 중히 여깁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족보 없는 놈이라고 하면 대단한 욕이 됩니다. 즉 그 근본을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 되니까요. 근본을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존재가 부정되고 무시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조상의 맨 꼭대기는 동물, 알 등등으로 끝나버리고 그 이상은 알지 못하니 이 무슨 모순입니까? 결국 우리들의 족보를 가지고는 인간의 근본도 그 가문의 근본도 모르고 만다는 사실만 보여줍니다. 그렇더라도 족보는 최대한 그들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자료, 조상들이 그 후손들에게 끼쳐준 계시적(?)인 자료 역할을 하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후손들이 그 족보의 기록을 믿지 않으면 그는 존재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자기가 누구인지는 모르게 됩니다. 자기 존재의 이유와 근거를 모르는 고아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족보
하나님께서 인간의 존재를 계시해주신 성경도 족보를 중히 여깁니다. 성경에는 요소 요소에 족보를 적어놓고 있습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족보를 중히 여기는 것 이상으로 성경은 족보를 통하여 신학적 신앙적 계시를 적어놓고 있습니다.
창세기 5장에 첫 족보가 기록되어 있고, 11장에 홍수 후의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대상 1장에서 9장까지가 족보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라나 느헤미야에도 족보에 준하는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바르실래 자손들은 제사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족보에서 그 이름을 찾을 수 없어서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스 2:61,62) 족보는 그 신분과 근본을 증명하는 권위 있는 자료였습니다. 신약성경도 첫 책이 마태복음이 그 시작을 족보로 장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3장에도 족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을 믿고 안 믿고는 사람의 자유라 할지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자기의 존재 곧 자기가 "있다"는 결과적 사실의 원인을 스스로 규명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 원인을 밝혀 본 결과가 인간을 아메바의 후손으로 만들어 놓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의 계시를 믿으면 그는 그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자기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를 잃어버리고 고아원에서 자란 아들을 찾아내 부모가 그 장성한 아들 앞에서 "얘야, 내가 너의 아버지다, 너의 어머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은 그 아들에게 부모의 계시가 전달되는 순간이며, 그 아들이 그 말을 믿으면 그는 부모를 찾는 것이고 그 부모의 자녀가 되며 자기의 존재의 근거를 알게 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으면 그는 영원히 고아로 있다가 없어질 뿐입니다.
성경의 족보는 모든 인류의 근본을 분명히 제시하며 맨 처음 시작까지 결코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 있습니다. 맨 처음 사람 아담에게서 모든 족보가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분명히 밝혀 놓았습니다. 우주의 시작이 하나님의 창조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은 분명히 지적합니다. 성경이 지적하는 족보는 적어도 네가지 신앙적, 신학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인류의 시작과 그 시작의 근본을 밝혀줍니다.
둘째, 각 개인의 존재 근거를 밝혀줍니다.
셋째, 민족의 발생과 그 계통을 밝혀줍니다.
넷째, 메시야 출현의 계통을 분명히 밝혀줍니다.

존재 근거
우리는 "내가 있는 것은 부모가 있다는 증명이다."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있는 것은 나의 조상이 있다는 증명이다."라는 말도 됩니다. 또한 그것은 나의 조상이 있게 된 근거가 있다는 증명이기도 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너무나 분명한 이런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이 되고 그렇게 계속 부인하면 결국 자기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가 없다고 계속 고집해왔으니 없게 될 날이 이를 것입니다. 그날이 최후의 심판의 때입니다. 심판은 하나님의 작위적 행위이기보다는 계속적으로 자기의 존재를 없다고 고집해온 사람들의 주장을 사실화시키는 것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같도다"(시 49:20)라고 분명히 말하고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시 14:1, 53:1)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이 자기는 부모가 원천적으로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나는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모가 없는 사람은 태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결국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만일 참으로 부모가 없이도 존재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자존자(自存者)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 중에 과연 누가 자존자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자기가 자존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지적하는 죄가 바로 이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없이 자기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죄인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창조주 없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며. 그 결과 창조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존재를 하나님께 돌려줄 수밖에 없게 되므로 그는 창조되기 이전 상태 곧 흙으로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창 3:1~19). 이것은 죄요 결국 그것은 바로 자기 존재를 부인한 것입니다. 이렇게 비존재 즉 존재가 없는 자가 된 자에게는 행동에 책임이 없습니다. 이 책임 없는 행동이 도덕적 죄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 앞에서 "당신은 내 부모가 아니요. 왜냐하면 하는 부모 없이 스스로 있기 때문이요"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큰 불효이겠습니까? 얼마나 바보이겠습니까? 집에서 그의 행동은 얼마나 방자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존재가 부모가 계신 증명인 것보다 더 확실하게 우리의 존재는 하나님이 계신 증명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명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기록하도록 하나님의 계시와 감동을 체험한 사람들에 의하여 성경이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있는 것들이 하나님이 계신다는 너무나 확실한 증명으로 있기 때문에 구태여 다른 증명을 하려고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18~20).

심판
이 성경절이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곧 심판을 가리킵니다. 그 심판의 때에 하나님 없이 자신이 있다고 주장해온 모든 사람들이, 그들이 주장해온 사실 곧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대로 그들의 존재를 영원히 상실할 것을 여기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가 곧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명이라는 너무도 단순하고 평범한 진리를 계속 거절한 사람들이 불의한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 증거가 저희들 자신임을 그들은 일부러 부인해온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가 계신다는 증거가 자기 자신들임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원천적으로 없다고 부인하는 것이 불효인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그랬는데 어떻게 그들이 계속 "있을"수 있겠습니까. 죄가 처리된다는 말은 없는 것을 없도록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명인데 어떻게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증명해야 하나님을 믿겠다고 고집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뿐인 것입니다(롬 1:28). 그것은 스스로 속이는 일입니다. 나는 진짜로 부모가 없이 태어났다고 고집한다면 그것보다 더 자신을 속이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존재 문제
그러나 아직도 문제는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창조했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질문은 성경 자체가 제기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애굽 관원을 죽이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하여 40년을 지난 후 어떤 날 시내산 밑에서 불타는 떨기나무 가까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거기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키라는 엄청난 명령을 듣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까"(출 3:13). 이런 엄청난 분부를 들은 모세는 이 명령을 하시는 분이 도대체 누구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모세는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이름은 그의 존재에 대한 확인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성경에서는 그렇습니다. 당신의 존재가 무엇이냐? 어떻게 존재하였느냐? 이런 모든 질문이 이름을 확인하는 데서 해결됩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모르며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하는 것은 그 이름이 잊어버린 바 됨이라"(전 9:5). 이름이 잊어버려졌다는 것은 존재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름을 확인하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요 그 존재의 근원을 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질문의 의미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의 존재에 대한 영원한 선언을 하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 3:14). 뜻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존재 근거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생물 무생물 간 어느 것이라도 그 존재 근거를 하나님께 두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호와이십니다. 곧 자신이 자기의 존재 근거라는 말입니다. 여호와라는 말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참으로 희한한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있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이니까 그럴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십니다. 만일 그럴 수 없다면 어찌 그가 하나님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자기 존재 근거를 다른 데 둘 수밖에 없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일 수가 없습니다. 그 존재 근거가 된 그것이 하나님이라야 합니다. 여호와라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너무나 당연한 이름입니다. 나는 하나님이 이 이름으로 당신을 모세에게 계시한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신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하나님 그는 여호와이십니다. 자존자이십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하나님이십니다.

기념 칭호 여호와
성경에는 이름을 기념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의 의미를 계시해 줍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의 근거라는 것을 지적하면서 그 이름이 기억할 표호라고 말합니다.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 칭호니라"(호 12:5). 기억할 표호라는 말과 기념 칭호라는 말은 원문에서는 같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라는 이름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원히 기억하여 기념케 하는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기억이라는 말이나 기념이라는 말은 어떤 것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는 무엇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도록 하는 것일까요? 누구에게 기억할 것을 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종종하는 수수께끼에 "내 것인데 주로 남이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의 정답은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계시하면서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표호"라고 했을 때에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영원히 기억해야 할 이름으로 계시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름 여호와가 기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이 이름 여호와는 적어도 네가지 기념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존재 양식의 기념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이 스스로 계신다는 사실을 이름으로 취하시므로 40그 이름은 기억할 때마다, 부를 때마다 여호와라는 이름하신 하나님은 창조되거나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자존하신 분이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자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바르게 아는 자가 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는 존재 근거를 모르는 족보 없는 자요 결국은 없는 자가 됩니다.

둘째, 창조주로서의 기념입니다.
이 이름 여호와는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 외에는 우주 만상이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존재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이 이름을 기억할 때마다 자기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자요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았으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일 이 이름이 기념하는 의미를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알았다면 어떻게 무신론이나 불가지론이나 진화론이 나왔겠습니까? 그래서 창세기 1장에서 천지와 만물의 창조에 대한 모든 것을 다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이 2장에서 사람 창조하는 과정을 별도로 기록하게 하시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로 계시한 것입니다. 하나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 외에는 사람이 기억하는 것과 같은 기능으로 여호와를 기억할 수 있는 존재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기억하고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유일한 지혜입니다. 짐승에게는 이런 지혜가 없습니다. 그것들은 여호와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특히 지혜를 가르치는 성경인 잠언은 하나님(엘, 혹은 엘로힘)이라는 칭호를 몇번 사용하지 않습니다(6회 2:5,17, 3:4, 25:2, 30:5,9 원어). 정말 우리의 시조는 이 이름의 의미를 잊어버리지 말았어야 하였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영원히 지혜로왔을 것입니다.

셋째, 심판주로서의 기념입니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은 모든 존재에 대한 최종적인 근거이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존재이든지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게 될 때에는, 여호와라 이름하신 하나님은 그에게 여호와 하나님이 창조해준 존재를 반납하라고 요구할 당연한 권리가 있습니다. 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심판입니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바로 그런 주장을 한 장본인입니다. 비록 사단에게 유혹되어 선악과를 먹는 행동으로 그런 주장을 하였을지라도 그런 주장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정당한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말로 하자면 다음과 같은 요구입니다.
"아담아, 네가 여호와 하나님과 상관없이 네 스스로 생명을 가지고 존재한다고 주장하였구나.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한 것이 아니냐? 그래, 그러면 하나님이 되어 보아라. 그런데 나 하나님은 여호와이다. 즉 스스로 있는 자이다. 그러나 너는 내가 너를 있도록 했기 때문에 있게 된 자가 아니냐? 그런데 이제 너는 여호와와 상관없이 네 스스로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주어서 네가 가지게 된 것은 나에게 돌려 줘야지. 그리고도 네가 있으면 너도 역시 하나님이다. 내 말이 옳지 않니? 자,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준 생명과 존재는 반납해야지."
이것은 당연한 요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음을 받은 아담에게는 존재를 상실하는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 뿐만이 아닙니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라도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에 의하여 존재하게 된 사실을 부인하면 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요구는 동일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심판의 가장 근본적인 것입니다.

넷째, 생명과 구원의 주로서의 기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자존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 스스로가 생명이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에게 생명을 의탁하고 있으면 그분은 그에게 영원한 생명을 공급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격적 존재들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서 죽음이 되어버린 자들에게 하나님은 또한 구원이 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청난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 없이는 결코 존재도 생명도 없는 것을 하나님 앞에 솔직히 시인하고 하나님께 그 존재와 생명을 의탁하고 돌아오면, 그는 그들을 구원하셔서 다시 생명적 존재가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신 말씀이(요 1:1)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은 태초부터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하도록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창세 전에 구원과 영생이 예정되었다는 것은 이런 원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 전, 또는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예정했다(엡 1:4,5 ; 롬 16:25,26)고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재창조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고후 5:17). 이 말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사람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로 없어져버린 사람을 다시 있도록 창조할 때만 비로소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임무를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헬라식으로 적은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여호와는 구원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구약의 여호수아는 예수님의 표상적 인물에 불과 하였으나 예수님은 참으로 구원하는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 하나님! 이 얼마나 엄청난 계시입니까!
하나님은 참으로 계십니까? 계십니다. 내가 있고 여러분이 있는데 누가 감히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할 것입니까?
다음에는 이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연구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김명호 목사님의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