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과 이 세상 역사의 궁극에 관해 자세히 설명한 책입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가장 확실한 희망을 제시합니다. 그 성경의 주요 내용을 알기 쉽게 정리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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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믿어야 하는가?
22
성경통신학교
2014-06-25
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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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믿어야 하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안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가 왜 믿어야하며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누구를 믿어야 하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예수님을 믿어야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오늘 날 이 세상에는 불신이 홍수처럼 넘치고 잇다. 앞에서 말하기를 세상의 사람들은 신뢰의 줄에 의하여 생활이 운영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불신의 홍수가 넘친다고 하니 모순이 아닌가?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다 사실임을 논리에 의하여서가 아니라 체험에 의하여 안다. 사소한 거래나 이웃끼리의 인정이나. 이발소에서 면도사에게 얼굴을 맡겨놓고 기분 좋게 자고 있는 모습이나. 그렇게 빈번한 교통사고에도 불구하고 마음놓고 운전사에게 전부를 맡기고 여행하는 사람들, 불량식품이 쏟아진다고 떠들어도 음식점은 여전히 만원이다. 이것은 사람의 생활이 이런 무의식적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의 증거이다.
그러나 인간이 타산적인 의식을 할 때 이러한 무조건적 신뢰가 성립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일단 의심해 보고 조심하고 확인한다. 이것은 인간은 한결같이 이기적이라는 증거가 된다. 이기심이 난무(亂舞)하는 곳에 신뢰가 없는 것이다. 인류의 시조가 범죄한 후 세상에는 이러한 불신의 물결이 흘러 오늘날 온 세상을 휩쓸고 잇다. 이러한 세상을 향하여 ‘나를 믿으라’ 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은 혁명적 선언이요, 폭탄 선언이다.
예수님은 무엇을 증거로 보여주고 믿으라고 하는가?
사람들이 믿어야 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절망성에 근거한다. 현세적 인간의 인격이 어떠하며 그들의 생명의 질은 어떠한가? 한마디로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의 인격은 죄의 인격이요. 그 생명은 사망의 생명이다.
어떤 곳에 온 마을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인격자가 있었다. 그는 마을의 보배였고 마을을 선하고 윤택하게 하는 자였다. 그러나 사람은 완전치 못하다. 이 좋은 사람이 어느 날 아차 하는 실소로 살인을 저질렀다. 그는 살인죄로 구속되었고 법정에 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나라의 법률은 이유를 불문하고 살인죄는 사형에 처하였다. 그래서 이 선한 사람, 온 마을을 복되게 하던 사람은 사형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생각할 때 이 사람이 사형 당하는 것은 마을에 이만저만 손실이 아니었다. 그래서 온 마을 사람들이 구명 운동을 벌렷다 진정서를 쓰고 도장을 찍고, 마침내 사법당국에 호소를 하였다.
그러나 법관들은 국법에 따라 판결하였을 뿐이므로 어쩔 수 가 없었다. 또한 이 간절한 진정서를 깡그리 무시하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다. 법관들은 국법과 전정서 사이에서 마임이 괴로웠다. 서로 의논을 거듭한 끝에 그 사형수를 법정으로 불러냈다.
“그대가 사형수로 사형 당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
“예 잘 압니다.”
“그런데 그대가 살던 마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대의 생명을 건져주기를 이렇게 진정하고 있으니 우리는 여간 괴로운 것이 아닐세.”
“..........”
“그래서 그대에게 한가지 특권을 주기로 의논하였으니 잘 들어보게.”
“무슨 말씀인지 말씀하십시오.”
“그대가 사형을 당해야 하는 사실은 국법에 의하여 어떻게 다른 도리가 없으나 사형당하는방법을 그대에게 선택하는 특권을 주려고 하네.”
“예 감사합니다.”
“우리는 세 가지 방법으로 사형을 집행하는데, 하나가 교수형(絞首刑)이요, 하나가 참수형(斬首刑)이요, 하나가 독약형(毒藥刑)이니 이 세 가지 중에서 그대가 원하는 것을 택할 특권을 주니 대답을 해보라.”
“고마우신 분부입니다. 저의생명이 걸린 중요한 것인데 생각할 시간을 며칠만 주십시오.”
이리하여 며칠이 지나고 이 사형수는 다시 불려나왔다.
“잘 생각하였는가?”
“예 깊이 생각하였습니다.”
“그럼 얼른 대답해 보라.”
“예 교수형부터 생각해 봤습니다. 교수형이란 목을 졸라 죽이는 것이 아닙니까? 사람이 목이 졸리면 답답해 어찌 견디겠습니까? 그래서 이것은 원치 않습니다.”
“그럼?”
“그 다음 참수형을 생각했는데 이것은 칼로 목을 베는 것이지요. 생각할수록 너무 잔인합니다. 그래서 참수형도 원치 않습니다.”
“음 그러니 독약을 마시겠다는 결정을 하였구먼.”
“그런데 재판장님! 독약을 마신다는 것은 얼마나 건강에 해롭습니까? 그래서 그것도 싫습니다.” 재판장은 조금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뭐야, 그럼 사형을 당하지 않겠다는 말이로군!”
“아닙니다. 결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왕 저에게 사형 당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특권을 주기로 은혜를 베푸셨으니 참으로 제가 원하는 사형을 당하게 해 주십시오‘”
“어떤 사형 방법인지 말해보라”
“에 저는 늙어서 사형을 당하고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도 문 제돌 것이 없다. 이 이야기는 누가 꾸민 이야기인 지는 모르나 내용은 분명하다 모든 사람은 사형수라는 얘기이다,

사람의 인격이 죄의 인격이라는 증거는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다. 역대의 아담의 후손으로는 죽지 아니한 사람이 누구인가? “죄의 삯은 사망”(롬6:23) 그러므로 이 세대 중에 누가 감히 자기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겠는가? 성경의 확실한 증언을 들어보자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10,11,23)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이 말씀은 병행 절을 찾아 대조하면 그 뜻을 당장 이해할 수 있게 된다. “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 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말은 롬3:23과 5:12절이 꼭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반의 말이 서로 다른데 전자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기록하였고 후자는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고 기록하였다.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말이 곧 죽는다는 말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죄로 말미암아 이른 결과이다.

오늘날 의학이, 생물학이 기타 과학이 이토록 고도의 발달을 하였어도 죽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다. 앞으로 더욱 발달하여도 이 세상적 과학의 힘으로 죽음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죽음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생명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이야기와 같다. 사실이다. 사람들은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진정한 의미의 생명인지 사망의 한 과정(過程)인지도 분명히 인식하지도 못하고 인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필자가 어느 지방에서 전도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계획된 설교의 순서에 따라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주제로 설교하였다. 그런데 그 시간에 어느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참석하였다. 이틀 후에 우리는 그 교장 선생님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몇 가지 권면을 마치고 난후. 그는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요전 저녁에 설교를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 저는 그 영생이라는 말이 실제로 무엇인지 개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생을 강조하셨는데 죄송하게도 저에게는 그 개념조차 떠오르지 않으니 알 수가 있어야지요, 영생이 무엇입니까?”
참 어려운 질문을 받은 것이다. 어떻게 대답을 해야 될까? 나는 미소를 띠고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선생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평생을 통한 경험 세계에 너무나 익숙한 것이 죽는다는 너무나 엄숙한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주위에 수천살 된 생존자를 혹시 보게 된다면 영생이란 저런 것인가 라고 생각이라도 할 수 있는데 말이지요. 혹시 영생을 주장하는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이 없는 삶을 보여주거나, 그렇지도 않고 영생이라는 말은 열심히 주장하니 참 휘황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선생님! 제가 한 말씀 여쭈어 보겠습니다. 영생이 무엇인지 개념이 안 떠오른다고 하셨는데 그럼 죽음이 무엇인지 확실히 아십니까?
교감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글쎄요’ 라고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죽는 현상이 어떤 것인지는 압니다. 그것은 경험 세계의 것이니까요. 그러나 죽음 그 자체가 무엇인지는 모릅니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죽는 현상이 죽음 자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하나의 착각이며 그 죽는 현상의 참된 의미나 상태는 모릅니다. 이제 제다 대답하지요. 영생은 죽음의 정 반대의 상태입니다. 이 대답이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입니다. 영생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상태가 어떤 것인지 아직 우리가 확실히 증명하지 못하나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그것이 확실히 있다는 사실을 알지요. 나는 믿음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생명 현상보다는 죽음 현상에더 익숙하다. 사실 사람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은 “흑암에 앉은 백성이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 이다(마4:15,16)
그러므로 우리가 살았다고 생각하나 실상은 죽은 자이다. “죄와 허물로 죽은자요”(엡2:1.5) 그러므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다.(히2:15)

세상에 공갈, 위협이 참 많다. 그러나 가장 무서운 위협이 무엇인가? 그것은 ‘죽인다’ 는 말이다. 사람은 자기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존재이기 때문에 죽인다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결코 죽지 않는 슈퍼맨이 있다면 그에게 죽인다는 위협은 한낱 우스운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이 죽는다는 사실 아니 좀더 과감하게 말하여서 죽었다는 사실이 인간의 절망성인 것이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계3:1) 가 현세적 인간의 전정한 상태인 것을 사람들은 잘 인정하려고 하지 아니한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는 절망의 부르짖음이나 희망의 응답을 받을 수 있는 부르짖음을 외치게 된다.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주가 나를 건져내라”(롬 7:24)

이 상에서 보면 죽음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날 흔히 경험하는 슬픈 경험 그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목숨이 끊어져서 호흡이 없고 모든 신체 기능이 정지하는 그 물질적 현상은, 인간의 참 상태 곧 죽음의 상태가 그 충격을 짓는 가긍한 모습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필자는 죽음을 항상 두 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하나는 진짜 죽음 다른 하나는 목숨이 끊어진 죽음이다. 목숨이 끊어지는 죽음은 오늘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죽음이다. 초상이 나고 상여가 나가고 울음이 있고 산에 무덤을 하나 더 보태어 놓는 죽음이다. 이것은 현세적 인간, 곧 죄인이었던 모든 사람이 어쩔 수 없이 당하는 “모든 사람의 결국”(전7:2)이다.

그러면 진짜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이다.(엡4:8)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것이 사망이다. 하나님 의지하기를 거절하는 모든 사람,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결코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진짜 죽은 자들인 것이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사실은 무엇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을 때의 생명력의 여운에 불과하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여름에 선풍기를 전기에 연결하여 돌리다가 스위치를 껐을 때 그 힘의 영향이 끝날 때까지 점점 속도를 줄이다가 마침내 멈추어 서게 된다. 아직 돌아가고 있다고 그 선풍기가 전기에 연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코드를 빼내거나 스위치를 끈 순간 그 선풍기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 돌아가던 힘의 영향력이 있는 때까지 돌아간다. 이런 것을 물리에서 관성(慣性)이라고 말한다. 이 예는 아주 적절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나 오늘 하나님의 생명에 떠나 있는 사람들이 누리고 잇는 생명 현상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예를 들어 본 것이다. 선풍기 스위치가 꺼졌을 직후에는 연결되어 있을 때의 속도와 방불하게 돌아간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속도가 점점 줄어서 마침내 정지한다. 시조가 타락하였을 그 가까운 세월 동안 인간의 수명은 천년 가까이 되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점점 줄어서 오늘은 백년도 채 못된다. 그만큼 처음 하나님이 부여해 주셨던 생명력의 그 영향이 줄어든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을지라도 이 짧은 생명 현상이 지속되는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에 복귀할 기회가 있다. 그래서 죽어가고 있는 아니 비록 진짜로 죽었으나 생명 현상이 잇는 지금 하나님의 생명에 다시 연결되도록 자신의 손을 하나님을 향하여 내밀어야 하는 것. 내어 미는 것, 이것이 믿음이요, 우리의 상태가 이와 같은 고로 믿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도덕적으로, 법률적으로 그들이 범하는 것이 없을 때 더욱 그렇다. 이러한 사람에게 “당신은 죄인이요, ” ‘죽었소’ 라고 말하는 것은 듣는 자에게 얼마나 불쾌한 일인가? 사람이 어떤 현실적 위기 즉 큰 파산이나 질병에 처해 있을 때 오히려 인간의 연약성을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영원한 생명을 취하는 일이 쉽다. 그의 현실이 연약성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사업이 잘되고 건강이 탁월한 때 이들은 죽음은 자기와 상관없는 것처럼 생활한다. 그러다가 목숨이 끊어지는 그 죽음이 갑자기 닥쳐올 때 그들은 절호의 기회. 하나님의 생명을 붙잡을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상태를 정직하게 바라보고 겸손하게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아직도 부여되고있는 생명 현상은 하나님의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로 가치가 지고한 것이며 이렇게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시간은 하나님의 생명을 붙잡을 수 있는 기간으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역사는 죄인이 되어버린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일을 하도록 허락된 은혜의 기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되고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관성이 있는 동안 나타나는 모둔 생활은 비록 그것이 생명의 관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생명에 직접적인 연결이 없고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타내는 모든 생활은 생활이요 죽은 행실인 것이다.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사59:2). “죽은 행실”(히6:1; 9;14)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존재 자체가 죄요 사망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존재의 입장에서 볼 때 없는 존재이다. 이러한 없는 상태를 실감하고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길이 믿음의 길이다. 그래서 사람이 현재 존재하고 생명이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지금 참된 생명과 참된 존재를 확립하여야 한다. 이 확립한 길이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의 길이다. 이 길을 우리에게 마련해 주심으로 예수님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 것이며 그의 인격을 통하여 증거해 주셨다. 이 길로 걸어가면 우리는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예수님을 실망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떻게 이런 길을 마련 하셨는가? 곧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지 연구해 보자. 현세적 사람들의 인격은 죄의 인격이요. 생명은 사망의 생명인 것을 우리는 연구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사랑하고 인간의 영원한 인격의 영광스러운 생활을 성취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어떠한 분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개체이심을 우리는 이미 연구하였다. 그 하나님이신 분이 육신이 되어 사람이 되신 분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0.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의 절정이시다.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시라”(요일5:20). 이러한 분이 사람되어 세상에 오신 것은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9요일3;80. 마귀의 일을 멸하려는 것, 그것은 죄를 멸하는 것이다. 이 죄는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하는 것이다. 9롬5:21). 그러므로 죄를 멸하는 것은 곧 사망을 멸하는 것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인간을 대신하여 인간의 죄를 취하시고 인간들이 죄로 죽을 그것을 당신이 사람되시므로 죽으셔서 죄의 값을 치르신 것이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예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시는 분이시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시어 혈육에 속하셨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고후13:4)그리하여 그가 죽으셨다. 예수님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계1:18)고 하셨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그들이 기대하는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여 평화를 정착시킬 분으로 생각하며 희망을 걸고 따라다녔다. 그러나 예수님이 잡히시고 십자가에 달리어 죽게 되자 절망과 낙담으로 다 흩어졌다. 그가 인류의 소망이기를 기대했는데 그도 다른 인간들과 꼭 같이 죽음으로 생을 마친 것이 아닌가? 그래서 예수에게 아무런 기대를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과연 예수께서 대신 죽어 주는 일이 아무리 고상하여도 그 일을 인해 그가 대신 죽어준 그 사람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 대신 죽는 일이 하나의 영웅적인 일은 혹시 될지언정 죽음 문제를 해결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까지가 예수님이 하신 일이라면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절망의 종교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불쌍한 사람이요, 믿으라는 권고는 헛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9)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교훈하실 때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아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0:37,38) 고 하셨다.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생활로 항상 증명하셨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을 믿으라”(요10:37,38) 예수님은 자신을 믿으라는 권고를 그가 행하신 일에 근거하셨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 믿을만한 일을 행하는 자가 자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요14:11)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도록 한 근거가 무엇인가? 과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부활이요 라고 말한 교훈이 행함으로 증거 되었는가? 이것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예수님의 교훈중에 좋은 말씀이 그 전부이지만 가장 본질적인 것은 윤리나 도덕의 좋은 교훈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존재와 인격을 걸고 하신 교훈이다. “내가.....이다.”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그 말이 사실인 것과 거짓말인 경우가 그것이다. 예수님은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과연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든지 그렇지 않으면 희대의 사기군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신학대학 학생 시절에 안식일 오후에 전도지를 전하러 어느 마을에 나갔던 경험을 잊을 수 없다.
조그마한 마을 넓은 밖 마당에 신수가 훤하고 몸골 좋은 할아버지가 몆몆 젊은이들을 지휘하며 일을 시키고 있었다. 그 할아버지 앞으로 가서 공순히 절하고 전도지를 드리면서,
“할아버지 교회에 나오십시오.” 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할아버지는 불쑥.
“이 사람아 지금 여기 뭘하고 있는지 아는가?” 라고 물었다.
“뭘 하십니까?”
“며칠 있으면 동제(洞祭)지낼 준비를 하는 중이야. 자네가 그 동제에 참석하여 우리와 같이 제사지내세, 그러면 나도 교회에 가지.”
멋진 교환 조건을 내 놓은 것이다.
“할아버지, 동제를 지내면 그 나무가 복을 준답디까?” 그 마을 동제는 마을 뒤쪽에 있는 아주 큰 고목에 지내는 것이었다.
“예끼 이 사람아, 그러면 예배당에 가면 무슨 복을 주나?”
참 이 말도 옳은 듯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말하였다.
“할아버지 우리가 예배당에 나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 나무에 제사하면 복 준다는 무슨 약속의 말이라도 있습니까?
“허허 이 사람아, 성경은 그전 성현의 말씀이야, 예수님은 성현이시지.”
이런 대화를 나누다가 할아버지는 문득 말머리를 돌렸다.
“이 사람아 나는 오래 살고싶어.”
“할아버지, 건강해 보입니다. 오래 사시겠어요.”
“이 사람아, 내가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은 죽기 싫다는 말이야. 내가 금년에 70인데 죽기 싫어.”
바로 이때다. 나는 얼른 할아버지의 말을 받았다.
“할아버지 제가 불사약을 드리지요.”
“이 사람아,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얼른 성경을 펴고 요한복음 11:25,26을 읽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보십시오 할아버지,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으십시오,”
“그걸 누가 믿겠나. 어찌 영생을 한다는 말인가?”
“할아버지 성현은 거짓말을 하십니까?”
“성현이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거짓말을 하면 성현이 되는가?”
“그렇지요. 성현이신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를 믿으면 영생하리라고 하셨으니 믿으십시오. 그러면 할아버지 소원이 성취될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나?”
“할아버지 예수님은 성현이시지 요?”
“그렇고 말고, 성현이시지.?”
“성현도 거짓말을 합니까?”
“성현이 어찌 거짓말을 하겠나?”
“그렇지요. 거짓말을 한하시는 선현 예수님이 나를 믿으면 ‘ 영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안 믿으십니까? 믿으십시오.”
이때서야 할아버지는 자기 말의 모순을 깨달았다. 그는 허허 웃으며 전도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으며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경험은 오늘 세상이 예수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축소판이었다. 오늘 세상은 예수님을 삼대 성인, 사대 성인중 하나라고 말한다. 책들이 그렇게 쓰고 사람들이 그렇게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님이 무엇을 했기에 상인인가? 그는 십자가에 죽었다. 이 죽음은 사랑의 절정의 행위라고 한다. 뭣 때문에 사랑의 행위인가? 예수가 당장 그 당시의 어떤 죽을 사람을 사랑으로 대신해 죽었다는 말인가? 강도 바라바를 대신했는가? 아니다. 결코 바라바가 죽는 것이 아까워 대신 죽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말하는 예수의 사람이란 무엇인가? 온 인류를 대신하여 죽었다는 성경의 말씀을 떠나서 결코 해답이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받아야 한다. 참으로 예수님은 그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이 그가 우리를 믿을 수 있는 넉넉한 근거로 제시한 행동이다.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셧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나셨으니”(고후13:4)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계1:17,18)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딤후1:10)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요 그의 생명은 영생의 생명이다. 이러한 확실한 증거를 그의 부활로 나타내셨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를 믿을 확실한 근거요 우리를 결코 실망시키지 아니한 행동이다. ”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행17:3)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우리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거 하였음이라 만일 죽은 자가 다 시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3-19)
예수님은 인간들로 하여금 믿어 구원 얻게 하려고 적어도 네 가지 특성을 취하셨다.
첫째는 그가 하나님이 신데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인(神人)이시다. 이 말은 예수님은 완전히 하느님이시오. 동시에 완전히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문제는 여러 곳에 여러 모양으로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특별히 말하지 않는다.
둘째는 그가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부활은 죽음을 전제(前提)로 한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으셨고 또 살아나셨다. 역대로 마귀는 예수님의 부활한 사실을 거짓 리이라고 증명하려고 노력했으나 결코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프랑크 모리슨(Frank Morridon)은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오랜 세월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고 마침내 한 권의 책을 저술하였는데 “누가 돌을 굴려 내었을까?” 라는 책이다. 이 책은 결국 부활이 확실한 사실임을 증거 하는 훌륭한 책이 되었고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셋째는 그는 사람으로 사시면서 결코 죄를 짓지 않았으며 우리의 완전한 모범이시다. 예수님은 탄생하실 때 죄없이 탄생하셨고 또한 결코 죄를 짓지도 않으셨다.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벧전2:22)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요일 3“5)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안이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4,15)
이와 같이 완전한 생애를 신성의 능력으로 사신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사셨다. 이것은 인간을 실망시키지 않는 믿음의 생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는 생활이었고 예수를 믿어 구원 얻은 사람이 그와 같이 살수 있다는 보증이 되기도 하였다. 이 모든 일에 그는 믿을 만한 증거를 주신 것이다.
넷째는 그가 이 구원의 길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기관으로 교회의 설립지가 되셨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부르심 편에서 이미 말하였다.
예수님은 33년 동안우리와 꼭 같은 사람으로 그런 사람이 사는 환경과 사회제도 아래서 사시면서 죄없으신 사실에 의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해 주실 자격을 가지셨으며 드디어 우리의 죄를 맡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흘려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마침내 부활하심으로 어느 모로 보더라도 우리가 믿을 완전한 인격을 제시하신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그분의 인격이 우리의 인격이 된다. 왜냐하면 그가 죽으실 때 우리의 죄의 인격을 취하여 가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의 죄없는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을 우리에게 주시고 영생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이와 같이 되는 것을 구원 얻었다고 말하는 것이다.